인간은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에 설득을 위해서는 이성이 아니라 감정에 호소해야한다는 류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맞는 말을 해도 마음이 들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는, 그래서 설득을 포기한 경험이 있다면 정말로 그런가 싶습니다. 감정에 호소하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도 실제로 살아보면 어느정도 맞는 말인 것 같긴 한데... 스티븐 핑커가 정면으로 반박했습니다.

⟪스켑틱⟫ 계간지를 올해부터 구독하고 있습니다. 스티븐 핑커는 스켑틱 2020년 3월호에 ⟨탈진신을 넘어 사실의 세계를 향하여⟩라는 글을 기고했습니다. 이글은 2019년 6월에 열린 '비주류 아카데미Heterodoxy Academy' 연례총회 기조연설을 바탕으로 합니다. 비주류 아카데미는 대학에서 정치적 발언을 제한하는 일련의 압력에 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대학 교수들의 비영리 단체입니다. Heterodoxy라는 단어는 이교, 이단이라는 뜻인데 참 마음에 들어요.

스티븐 핑커 Steven Pinker. 출처: https://famousbio.net/steven-pinker-12571.html

기조연설은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HxA Conference Keynote 2019

그는 서두에서 '탈진실의 시대post-truth era'라는 표현의 허구성을 지적합니다. 이후에 인간은 본질적으로 합리적이라는 것을 논리와 수렵채집인들의 사례를 통해 증명합니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합리적인 인간이 왜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선택을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소개합니다.

  • 인공지능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인지심리학자 허버트 사이먼Herbert Simon: 합리성에는 한계가 있어야 한다. 완벽하게 합리적인 사람이 되려면 세상의 모든 시간과 무한한 기억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정확성을 희생해 효율성을 추구한다.
  • 사실과 논리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강력한 동기중 하나인 유능하고 너그럽게 보이고픈 자기표현 욕구를 양보해야 한다.
  • 사회적 압력 때문에 비합리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신이 삼위일체라고 하거나 힐러리 클린턴이 워싱턴의 피자 가게에서 아동 성매매 업소를 운영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집단을 위해 기꺼이 위험을 무릅쓸 의지가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위 글 내용과는 직접적인 상관은 없지만... 코로나19 사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앤드루 쿠오모 뉴욕 주지사의 인기가 날로 치솟고 있습니다. 팩트와 숫자로 브리핑을 하는 쿠오모 주지사도 탈진실의 시대가 허구라는 반례가 될 것입니다.

스티븐 핑커의 글 모든 부분이 좋아서 전체를 다 필사해 올리고 싶지만 그럴수는 없으니... 아래는 중요 부분을 발췌했습니다. 스켑틱 구독하세요!

대학이 지식, 진실, 이성을 장려하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기를 요구하는 사람은 그런 기대는 20세기에나 먹혔다는 반론에 부딪치게 마련이다. 우리는 '탈진실의 시대post-truth era'를 살고 있지 않나? 인간이 본질적으로 비합리적이라는 사실은 인지심리학자들에 의해 증명되지 않았나? 공평한 이성과 객관적인 진실의 추구는 시대착오적인 계몽주의의 유물임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이들 질문의 대답은 전부 '아니오'다.

우선 우리는 탈진실의 시대를 살고 있지 않다. 왜일까? "우리는 탈진실의 시대를 살고 있다."라는 문장만 놓고 생각해보자. 이 말이 진실인가? 만일 그렇다면, 이 말은 진실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비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비합리적이다."라는 문장을 생각해보자. 이 문장이 합리적인가? 만약 그렇다면, 이 말은 진실일 리 없다. 적어도 이 문장을 말하고 이해한 주체가 인간이라면 말이다. (선진적인 외계인 종족들끼리 나누는 대화를 관찰한 것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인간이 정말로 비합리적이라면 합리성의 기준은 대체 누가, 어떻게 마련했단 말인가? 그들은 합리성과 비합리성을 어떻게 비교했을까? 우리는 왜 그들을 믿어야 할까? 대관절 우리가 어떻게 그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

탈진실의 역설

철학자 토머스 네이글Thomas Nagel은 ⟪마지막 한마디The Last Word⟫에서 진실, 객관성, 이성은 합의나 논의를 통해 변경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증명했다. 당신이 그 존재를 반대하기 시작하는 순간 당신은 그것들을 옹호하는 셈이 된다. 곧 당신은 저도 모르게 이성에 의탁한다는 뜻이다. 네이글은 이를 '데카르트 논증'이라 부른다. 누군가 자신의 존재를 깊이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그의 존재를 증명하고, 이성의 타당성을 시험하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이 이성에 의탁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데카르트의 유명한 논증에 따른 것이다. 우리가 이성을 믿지 않고, 옹호하거나 정당화하지 않으며, 때로 이성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네이글의 표현대로 이 모두는 "불필요한 논쟁"이다. 우리는 이성을 믿지 않는다. 그저 이성을 이용할 뿐이다.

이 말이 궤변처럼 들릴 수 있지만 우리의 일상적인 논쟁에도 이런 개념이 담겨 있다. 당신에게 동의하는 말을 하도록 상대방을 구워삶거나 을러메지 않고, 당신이 옳다고 (그래서 당신을 믿어야 하고, 당신이 거짓말을 하거나 허풍을 떨고 있지 않다고) 그들을 납득시키려 노력한다면 당신은 이미 이성의 지배를 인정한 셈이다. 이성이 아닌 다른 경로를 통해 무언가를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순간 당신은 그 논쟁에서 지는 것이다. 이미 이성에 호소했기 때문이다. 이성에 대한 옹호가 불필요하고 불가능하기까지 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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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수렵채집인들이 합리적 추론과 회의주의, 토론을 활용해서 의사결정을 하는 이야기)

누군가 내게 우리의 비합리성과 독단성이 우리의 진화적 기원 때문이라고 말하면 나는 수렵채집인을 탓하지 말라고 반박한다. 수풀이 부스럭대면 몸이 얼어붙는 본능과 마찬가지로 합리적 추론, 회의주의, 토론 역시 우리의 본성이다.

내 경우를 예로 들면, 나는 종종 무엇하러 사람들을 데이터와 그래프로 설득하려 하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모순되는 증거를 마주해도 사람들은 절대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들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말은 과장이다.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과 다름없는 신성한 믿음에 위배되는 증거가 나오면 사람들은 그 믿음에 한층 더 끈질기게 집착한다. 그러나 나이한과 나이플러는 지구의 기온이 상승했는지(우파에 속한 사람들), 또는 2007년에 조지 W. 부시가 이라크에 군대를 급파한 후 테러리스트 공격이 줄었는지(좌파에 속한 사람들)등 매우 정치적인 주제에서도 증거가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음을 증명했다. 명확한 그래프의 형태로 사실을 제시하면 열성당원들조차 생각을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