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빈저 연구소, ⟨상자 밖에 있는 사람⟩, 2016, 위즈덤아카데미

뿌리가 있는 자기계발서 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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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서적만 읽다가 오랜만에 자기계발서를 한 권 읽었다. 기계인간님이 적극 추천했던 책이라 궁금해서 읽었고 역시 정말 좋은 책.

책에서는 회사 내의 인간관계들에서 발생하는 갈등의 원인 분석과 해결법에 초점을 맞춘다. 여러 자기계발서에서 두루뭉술한 언어로 무의미하게 일반론을 다루지만, 이 책은 회사라는 제한된 환경 안에서 적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 방법을 부부관계와 가족관계에까지 적용하는데, 주제넘어보일 수도 있지만 내가 보기엔 충분히 인생 전반에서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이 책의 가르침이 마르틴 부버의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 너⟩와 ⟨상자 밖에 있는 사람⟩ 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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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부버는 책 ⟨나와 너⟩에서 사람간의 관계를 '나와 너', '나와 그것'의 두 가지로 분류했다. '나와 너'의 관계는 서로를 동등한 사람 즉 인격적인 대상으로 대하는 관계고, '나와 그것'은 우리가 물건을 대할 때의 방식 즉 상대방을 인격적인 대상으로 대하지 않는 관계다. 참다운 삶을 살기 위해선 '나와 너'의 관계를 맺어야 한다.

(대한민국에는 마르틴 부버의 책 제목으로 이름을 짓고 활동하는 매우 성공한 아티스트가 있는데 바로 아이유(IU)다. IU(=I You)가 바로 나와 너다. 인성 좋고 팬들한테 잘하기로 유명한 아이유를 보면 팬과의 관계를 '나와 그것'이 아니라 '나와 너'의 관계로 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꾸준한 인기의 비결일지도...)

'나와 너'와 '나와 그것'은 이 책에서 '상자 밖에 있다', '상자 안에 있다'와 대응한다. 상자 밖에 있다는 것은 상대방을 동등한 인간으로 대하는 것이고, 상자 안에 있다는 것은 상대방을 동등한 인간으로서 대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책은 이 관계들이 어떻게 발생하게 되는지, 즉 어떻게 상자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상자 밖으로 나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제안한다. 마르틴 부버의 철학을 현실 문제에 적용한 훌륭한 실용서다.

⟨상자 밖에 있는 사람⟩과 ⟨미움받을 용기⟩ 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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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기시미 이치로가 알프레드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을 ⟨미움받을 용기⟩로 풀어쓴 것처럼, 이 책은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에 담겨있는 철학을 회사에서 적용할 수 있게 도와준다. 몇 가지 공통점이 더 있다.

기시미 이치로는 ⟨미움받을 용기⟩를 쓸 때 플라톤 대화편의 형식을 빌려왔다. 철학자와 청년이 대화를 나누면서 철학자가 청년에게 가르침을 주는데, 정말 놀랍게도 철학자의 발언을 읽으면서 내게 떠오른 질문들을 거의 곧 바로 청년이 철학자에 질문했다. 작가가 정말 탁월하다고 느낀 부분이다.

⟨상자 밖에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대화로 진행된다. 대화 속에서 버드가 톰에게 가르침을 전달하고, 이것은 철학자와 청년의 관계와 유사하다.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읽는 독자는 제 3자가 된다. 작가가 직접 독자에게 내용을 전달할 때보다 독자는 작가에게서 한 걸음 더 멀어진다.

이를 통해 독자는 자신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고, 작가가 전달하려는 가르침을 받아들일 때 거부반응이 줄어든다. 문학은 유익한 가르침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문학 당의정糖衣錠설은 자기계발서와 잘 어울린다.

⟨미움받을 용기⟩의 철학자는 개인심리학의 창시자 아니라 알프레드 아들러의 철학을 소화해 청년에게 전달하는 사람이다. ⟨상자 밖에 있는 사람⟩의 버드도 마르틴 부버의 철학을 톰에게 전달하는 사람, 그러나 여기서는 마르틴 부버가 직접 언급되지 않고 '루 허버트'라는 가상의 인물이 등장한다.

사라진 마르틴 부버 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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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인 점은 마르틴 부버라는 이름이 책에서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 한국어 판에는 맺음말에서 갑자기 퇴계와 세종이 등장한다(..?). 한국어로 '상자 밖에 있는 사람'과 '마르틴 부버'를 함께 검색해도 결과가 거의 나오지 않았지만.. 하나 찾았다.

이는 다른 사람을 도구적인 가치 즉, 하나의 대상(objects)으로 보지 말고, 우리와 같은 욕구와 소망 걱정을 가지고 있은 한 인격체로서의 인간으로 보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틴부버의 <나와 너>의 개념을 학문적으로 발전시켜 그 실천적인 방법을 제시한 것이 오늘날 이 책이 세계적으로 주목 받고 있는 이유이다. 이 책의 기초가 되는 이론적인 업적은 개인적인 문제에서 사회전반에 걸친 문제까지, 우리 사회의 병리를 진단하는데 심층적이고 중대한 것이다. (럼 해리,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심리학 교수)

- ⟨평화에 이르는 길⟩ 소개, 인터파크 도서

책 ⟨평화에 이르는 길⟩은 다른 출판사에서 동일한 역자와 함께 2006년에 낸 책이다. 목차를 보니 ⟨상자 밖에 있는 사람⟩과 내용이 달랐다. 알고보니 이 책은 ⟨상자 밖에 있는 사람⟩의 속편인 ⟨나를 자유롭게 하는 관계⟩와 동일한 책. ⟨상자 밖에 있는 사람⟩은 2001년에 ⟨상자 안에 있는 사람 상자 밖에 있는 사람⟩으로 출판된 책이었다. ⟨나를 자유롭게 하는 관계⟩는 2006년에 ⟨평화에 이르는 길⟩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던 책. 2000년대에 출판되었던 책을 위즈덤아카데미에서 동일한 역자와 함께 다시 출판한 것이었다.

여튼, 마르틴 부버의 철학에 기반을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르틴 부버의 이름은 언급하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르틴 부버는 2006년의 ⟨평화에 이르는 길⟩ 책 소개에서 한 번 등장할 뿐, ⟨상자 밖에 있는 사람⟩은 물론 ⟨나를 자유롭게 하는 관계⟩의 책 소개에도 역시 그 이름은 없었다.

마치 이 모든 것을 아빈저연구소에서 만들어 낸 것처럼 느껴지도록.

실제로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를 읽어보면 내용 자체도 쉽지 않을 뿐더러 번역이 매끄럽지 않아 한국어로는 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의 철학에서 현대인이 실천할 수 있는 가르침을 풀어내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고전의 가르침을 현실 문제에 적용할 수 있도록 풀어썼다는 점에서 충분히 가치가 있는 책이다. 왜 철학의 기반을 숨겼을까? 어떤 고전에 기반을 두었는지 밝혔다면 더 깊은 탐구를 원하는 독자들에게 도움이 됐을텐데. 약간괘씸.

그래도 추천 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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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튼.. 괘씸한것과는 별개로 책 내용은 좋다. 회사 생활에 (그리고 인생 전반에) 적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내용들이다.

많은 자기계발서들이 그러하듯 다 읽고 나면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인 경우가 꽤 있다... 라고 생각하면 배우신 분이고 훌륭하십니다. 본인이 알고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이 아니고, 당연한 내용이거나 이미 알고 있던 지혜라도 이렇게 자기계발서로 정리되면 낯설게 볼 수 있다. 새로운 형식에 담아 출판되는 책들로 깨달음을 얻는 사람들이 있다. 당연한걸 감탄하며 읽는 나처럼...

좋은 책이다. 추천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