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평화는 '지금, 여기' 흘러가는 찰나에 있습니다. 과거를 떠올리면 후회하고, 미래를 생각하면 걱정을 합니다. 현재를 충만하게 느끼는 것만이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 궁극적인 방법입니다. 20대 중반에 이 진리를 가르침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책을 읽다보면 이 진리를 종종 마주치게 됩니다. 올해 상반기에 읽었던 책들에서도.

질 볼트 테일러,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질 볼트 테일러,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2019, 윌북

뇌과학자가 뇌졸중을 겪고 회복한 과정을 담은 책. 작가는 좌뇌 측두엽에 발생한 뇌졸중 덕분에 얻은 깨달음을 긍정적인 어조로 이야기합니다. 그녀는 좌뇌가 제대로된 기능을 하지 못하자 자아가 약해지면서 우주와 합일된 느낌, 평화와 충만함을 얻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뇌졸중 경험으로 축복에 가까운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누구든 언제라도 깊은 마음의 평화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열반과도 같은 경험이 우뇌의 의식 속에 존재하며, 언제라도 스스로 뇌의 그 부분에 접속할 수 있다고 믿는다.

p107


'평화는 생각하기 나름이야. 평화를 이루려면 지배적인 왼쪽 뇌의 목소리를 잠재우기만 하면 돼.'

p107

좌뇌의 재잘거림이란?

좌뇌는 내가 외부 세계와 소통할 때 사용하는 도구다. 우뇌가 이미지들의 콜라주로 생각한다면, 좌뇌는 언어로 생각하고 끊임없이 내게 말을 건넨다. 뇌의 재잘거림을 통해 내가 삶에 뒤쳐지지 않게 해줄 뿐만 아니라 정체성을 드러내주기도 한다. 좌뇌의 언어 중추가 '나는 무엇무엇이다'라고 말함으로써 나는 영원한 우주의 흐름에서 떨어져 나온 독립적인 존재, 단일하고 견고한 존재가 된다.

p143

좌뇌의 재잘거림이 멈추면

...티베트 수도승과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녀들을 불러 SPECT 기계 안에 들어가 명상을 하거나 기도를 올리게 했다. 이어 명상이 절정에 달하거나 신과의 합일을 느끼는 순간, 실을 잡아당기도록 했다. 이 실험을 통해 뇌의 특정 부위의 신경 활동이 달라지는 것이 확인되었다. 첫째, 좌뇌 언어 중추의 활동이 감소해 뇌의 재잘거림이 멈추었다. 둘째, 좌뇌 상두정이랑에 위치한 정위연합 영역의 활동이 감소했다. 이 부위는 우리가 신체 경계를 확인하도록 돕는 곳이다. 이 곳의 활동이 억제되거나 감각계로부터 들어오는 입력의 양이 줄어들면, 우리는 공간감을 잃고 우리 몸이 어디서 시작하고 어디서 끝나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최근의 이런 연구 덕분에 좌뇌의 언어 중추가 침묵하고 왼쪽 정위연합 영역이 정상적인 감각을 입력받지 못했을 때, 내 의식이 바뀌어 몸을 고체가 아니라 유동체로 지각하고 우주와 하나가 되는 기분을 느낀 것을 신경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p137

영원

왼쪽 뇌는 내가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연약한 개인이라고 생각한다. 오른쪽 뇌는 내 존재의 중심에 영원한 삶이 있다는 것을 안다. 언젠가 이런 세포들이 죽고 3차원 세상을 지각할 수 있는 능력이 사라지겠지만, 이것은 내 에너지가 고요한 희열의 바다로 다시 돌아가 흡수되는 것일 뿐이다.

p165

이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 담겨있는 깨달음과 동일합니다.

사실과 생각

왼쪽 뇌의 언어 중추와 이야기꾼 기질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자 내 마음은 무모한 이야기를 지어내고 부정적인 사고 패턴으로 이어지는 경향을 보였다.

p154

이 때 필요한 것은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생각인지 구분하는 것입니다. 좌뇌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생각이 사실인 것처럼 강요합니다. 생각에서 사실을 추출해 내야 자신이 느낄 감정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좌뇌의 자동 해석을 거부해야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깁니다.

감정은 선택할 수 있다

그녀가 얻은 또 다른 깨달음은 감정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

뇌졸중을 통해 내가 배운 최고의 교훈이라면 감정을 몸으로 느끼는 방법을 배운 것이다.

...

어떤 감정을 얼마나 오래 느낄지 결정하는 권한이 내게 달려 있었다.

...

왼쪽 뇌의 힘이 점차 강해지면서 내 감정이나 상황을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이나 외적 사건 탓으로 돌리고 싶어졌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나와 나의 뇌 말고는 나에게 어떤 기분을 느끼게 만들 사람은 없었다. 외부의 그 무엇도 내 마음의 평화를 앗아갈 수 없었다. 그것은 온전히 나의 문제였다. 내 삶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통제할 수는 없지만, 내 경험을 어떻게 지각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내게 달려 있었다.

p118


나는 책임감이란 '특정 순간 감각계로 들어오는 자극에 어떻게 반응할지 선택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영어로 책임감을 뜻하는 'responsbility'는 반응response하는 능력ability이다). 자동으로 활성화되는 변연계감정 프로그램도 있는데, 하나의 프로그램이 활성화되었다가 완전히 멈추는 데 90초 정도가 걸린다.

...

그런데 90초가 지났는데도 여전히 화가 나 있다면, 그것은 그 회로가 계속해서 돌도록 스스로 의식적으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순간순간 우리는 신경 회로에 다시 접속할지, 아니면 감정을 스쳐 지나가는 단순한 생리 현상으로 사라지게 할지 선택하는 것이다.

p148

평화는 '지금 여기'에

우뇌에게는 '지금 여기right now, right here'가 전부다. 고삐 풀린 열정으로 여기저기 뛰어다닌다. 세상에 아무 걱정도 없다. 많이 웃고 아주 친절하다.

p140


오른쪽 뇌는 이렇게 소리친다. "나는 모든 것의 일부이다. 이 땅의 우리 모두는 형제자매들이다. 우리는 이 세상을 좀더 평화롭고 친절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여기에 왔다."

p143


마음의 깊은 평화를 느끼고 친절함을 공유하는 것은 서로를 위한 선택이다. 타인을 용서하고 스스로를 용서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을 완벽한 순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p151

즉, 마음의 평화를 얻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좌뇌의 재잘거림을 멈추어 자아를 잠시만 잠재우고
  2. 지금, 여기에서 내가 우주와 하나라는 것을 느끼기

아마 좌뇌의 재잘거림을 멈추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위빳사나 명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좌뇌의 재잘거림 멈추기: 위빳사나

... 얄궂게도 저자(유발 하라리)는 인류 3부작 완결편의 마지막 부분쯤에서야 자신이 위파사나 명상 신봉자임을 고백했다. 이 명상을 통해 우리는 부처가 성찰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인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 또한 헛된 것”임을 깨닫고, 모든 허구의 개체와 마찬가지로 나라는 존재 역시 허구일 뿐이라는 사실을 수용하게 된다.

에블린 파에예, <모든 허구는 시장에 있다>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내가 우주와 하나: 나는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다

원인을 찾을 수 없거나 해결하기 어려운 불안이 찾아올 때 되뇌이는 말입니다. 나는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다.

'나는 어디에도 없다'는 불교의 공空 에서 가져왔습니다. 혹시 우주가 텅 비어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빈 공간'...원자는 99.999%가 텅 빈 공간이다!) 물질은 소립자들의 반발력에 의해 존재할 뿐 그 실체는 텅 비어있습니다. 부처가 무아無我를 강조했던 것처럼. '나는 어디에도 없다'라고 되뇌이면 세상의 무상함에 생각하게 되고 내가 느끼는 감정도 덧없게 느껴집니다.

'나는 어디에도 있다'는 말은 기독교의 무소부재無所不在 에서 가져왔습니다. 기독교의 신은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런 신이 우리 안에 있고, 우리도 신 안에 있습니다.

하늘과 땅 어디를 가나 내가 없는 곳은 없다. 똑똑히 들어라.

- 예레미야 23장 24절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알고 또 믿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 요한일서 4장 16절

제게 신은 우주 삼라만상, 곧 코스모스입니다. 우주 137억년 역사 끝에 제가 만들어졌고 운이 좋으면 약 100년의 여행을 마친 뒤 다시 우주와 하나가 될 예정입니다. '자아'는 물질이 만들어낸 기적이고, 물질이 작동을 멈출 때 저는 영원한 평화로 되돌아갑니다. 우리가 우주 안에 있고, 우리가 곧 우주이며, 우주가 우리 안에 있습니다. '나'라는 호모 사피엔스의 형태를 잠시 취할 뿐 나는 영원하고 나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습니다.

나의 죽음과 인류의 종말을 받아들이기

요새 날씨가 너무 시원해서 꿀도 채취할 수 없다고 합니다... 기후변화로 정말 세상이 망할 것 같아서 걱정 되더라구요. 그래서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내린 결론은,

세상이 망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긴 합니다. 어디 지구 역사에서 생물들이 멸종했던 적이 한 두 번인가요. 35만 년 동안 가꿔온 호모 사피엔스의 DNA는 아깝지만 또 언젠가 인류에 버금가는 생물이 탄생할테니, 인류가 멸종한다고 해도 우주 삼라만상에 큰 영향은 없겠죠.

그러나 종말을 맞이하면서 감내해야 할 고통은 두렵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건강하게 살다가 잠 자면서 고통없이 죽기를 바라는 것처럼, 인류가 멸종할 때도 고통 없이 사라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결국 중요한 건 죽음이 아니라 고통인 것 같습니다. 살아가면서 세상에 존재하는 고통을 줄이지는 못 할 망정 늘리지는 말아야겠습니다.

참고자료